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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상경하고 생긴 목적 없는 산책서울로 상경한 이후 혼자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익숙해져 갔다. 밤이 되면 홀로 집 앞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좋았고, 혼자 생각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왜 그런 생활을 하냐고 반문했고 나는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마음이 편해지고 공상하고 명상하는 시간이 좋다고.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님께서 기고하신 "번아웃 막는 최고의 실천은 걷기, 혼자서 아무 목적 없이 산책하라"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한 중요함과 여러 연구를 통한 인과기제에 대한 글은 1년 만에 나를 다시 제주도로 이끌었다.
2018년 방문한 '제주도 관음사'
2018년 제주도 여행태어나 처음 홀로 떠난 18년도 제주도는 목적 없는 여행이었다. 어느 맛집에서 음식을 먹고 어느 카페를 방문해야 하는지 정해진 것도 없었다. 정해진 것은 2박 3일 동안 지낼 숙소뿐이었다. 이마저도 비행기를 타기 이틀 전에 예약했으니 집 앞 산책이 제주도 산책으로만 바뀌었을 뿐, 내 목적 없는 명상의 목적은 유지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제주 국수를 먹고 그곳에서 찾은 여행지를 따라 무작정 차를 몰았다. 첫날 목적지인 하이엔드 제주에서 '벤처스퀘어' 명승은 대표님을 우연히 만났다. 혹시나 나를 기억 못 하실까 직업병처럼 들고 다니는 내 명함을 쥐고 인사를 드리러 갔다. 5년 만에 만난 스타트업 인연은 다행히 서로를 기억했고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말자'라는 스타트업 마인드를 기억하자며 헤어졌다.
1. 제주 고기국수, 2. 국수집에서 득한 지도, 3. 오랜 인연을 연결해준 '하이엔드 제주'
엄마가 날 임신하셨을 때 국수를 그렇게 좋아하셨단다. 그래서인지 둘째 날에도 국수를 먹으러 갔다. 운도 좋지, 1시간은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던 '가시 아방'에 도착하자마자 내 차례가 됐다는 연락을 받고 자리에 앉았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먼저 혼자 온 남자 손님이랑 헷갈렸단다.
뭔 생각인지 몰라도 '나는 세트 먹고 싶은데 같이 합석해서 세트를 주문하자' 제안했고 처음 본 88년 동갑내기 남자 둘은 함께 여행 온 것 마냥 같이 세트를 시켜먹었다. 혼자 여행을 그도 직업병인지, 명함을 가지고 여행을 왔고 나도 가방에서 쑥스럽게 명함을 꺼내 교환했다. 상장기업에 다니는 그는 곧 좋은 소식 있을 테니 여유 돈 있으면 주식을 사놓으라고 말을 한 뒤 BMW 전기차를 끌고 떠났다. BMW를 타는 걸 보니 번아웃을 견딘 본인에게 주는 선물인가 했다. 참고로 그 친구가 말한 주식은 제주도에서 돌아온지 일주일도 안되서 24% 올랐다. 당연히 나는 그 로켓에 못 탔다.
왜 혼자왔냐는 물음에 '그냥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라고 대답한 동갑친구
2019년 제주도퇴근 후 좋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프로젝트로 보낸 19년도는 젊을 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을 해본 해다. 비록 자주 타진 않지만 차도 사고, 해보고 싶은 공부도 맘껏 하고, 내겐 과분한 스펙의 비싼 전자 기계들도 샀다. 그럼에도 물질로 채우지 못 한 공허함 때문에 다시 제주도로 향했다.
이번엔 취미로 산 카메라와 트라이팟과 함께였다. 워낙 철면피에 낯가림이 없는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내게 쉬운 일이었다. 기억은 사라지고 사진만 남는 게 싫었기 때문에 작년에 봐 둔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부터 시작했다.
애월읍 고내 1길 18년 제주 여행 때, 공항 가기 전 도착한 고내 1길, 언덕 아래 정자가 있고 지평선이 이쁘게 펼쳐져 있어 폭넓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바람이 많이 불고 삼거리라 차가 많이 다녀 사진 찍기 어려우나, 빛이 들어올 때 맞춰 사진을 찍으면 색감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추억 뽀개기 완료.
18년, 제주 애월음 고내1길
19년, 제주도 도착하자마자 추억 되새김질
청춘사진관수지가 왔다 사진 못 찍고 가서 유명해진 사진관. 네이버에서 예약하면 사진 한 장 더 찍어준다. 부부가 운영하며 와이프분과 대화하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상당히 유쾌하며 나에게 저런 표정도 있었구나 할 정도로 다양한 표정을 이끌어내 주신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보고 싶다면 청춘사진관으로.
내가 찍은 사진들
협재해수욕장애월읍에 위치한 협재 해변은 저녁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협재해변
혼자 폰카로 찍는 여행객, 내년엔 카메라 사각대 사서 오길
낮에도 이쁘다
왕따나무드 넓은 평야에 홀로 있는 나무. 목에 카메라 등엔 삼각대를 메면 연인들이 사진찍어달라 부탁을 자주한다. 귀찮지만 그래도 찍어준다. 한장은 니 짧은 다리에 다음 한장은 니 사랑하는 여친 인중에 포커스를 두고.
본태 박물관입장권이 2만 원으로 비싸니,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해두는 것이 좋다. 1~3관 까지 꽤 넓어 관람 시간이 1시간 정도로 길다. 연예인들도 많이 찾는 사진 스팟이 많으니, 방문해보길.
이번 여행 동반자 호루스벤누 TM-5LN
본태 박물관 조명의 방 정신 놓기 딱 좋다.
갯깍 주상절리팀원분이 추천해준 갯깍 주상절리. 입장이 금지되었다는 팻말이 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10분 넘게 험한 돌길을 걸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홀로 사진 찍으러 온 사람은 나뿐이었기 때문에 앞에 15팀 정도를 내가 찍어주고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데 10분 만에 사진 찍고 돌아왔다. 두 명이서 서로 번갈아가며 찍어주고,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기 때문에 오래 기다려야 하니, 각오하고 가야 할 것 같다.
천연 동굴이 만들어 낸 조명이 이쁘다.
갯깍 주상절리 웨이팅
가시아방미들급 오마카세 '오가와'를 추천해준 선배가 알려준 가시아방. 작년엔 홀로 여행 온 동갑내기, 이번엔 혼자 온 유투버와 세트를 먹었다. 아쉬울 것 없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유투버가 부러웠다. 갑자기 회사원들이 하는 구라들이 생각났다.
나 유튜브 할 거다.
나 퇴사할 거다.
출근시간에 자기 계발할 거다.
저 샊이 어제 죽였어야 했는데
저 샊이 오늘 죽여야 하는데
저 샊이 내일 어떻게 죽일까
오늘까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직장인들은 안다. 금요일은 '모든 일이 ㅈ됐는데, 다들 모른척하고 집에 가는 날'이라는 것을.
유투버를 만났다.
관음사절을 자주 가는 이유는 뽕나무 향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근처에 울창한 숲들이 내뱉는 공기와 흙냄새를 맡기 위해서다.
관음사 입구
사진찍는 걸 구경하시는 어르신들
제주 여행은 항상 성공적이다. 추억을 되새김질했고, 비싸게 산 장비들을 적절하게 활용했고, 사회에서 만나기 힘들 인연을 연결해주었다. 부모님이 왜 젊을 때 많이 여행 다녀라 하는지,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는지 재고해보자.
사람이 일생동안 먹는 음식량은 평상시 음식량을 기준해 3t 트럭으로 약 9대분(약 27t)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이 71.3세(90년 인구센서스)이므로 하루 세끼씩 꼬박꼬박 먹는다면 평생 모두 78,124끼(평년 때 365 ×71.3 × 3+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 때 17일 × 3)를 먹게 된다.
글을 쓰다보니 여행일기가 되버렸다. 아무튼 일생동안 여행을 갈 수 있는 시간 또한 유한하다. 번아웃에 지친 직장인이라면 집 앞 산책을 당장 시작해보자 그리고 목적없이 제주도로 발 길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
내년엔 영국을 가볼까 한다.